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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화가 대표작 30여 점 재조명
“물방울로 세계의 무상성 보여줘”

200여 개 문자와 단 하나의 물방울을 대치시킨 1991년 작,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7x333.3㎝. [사진 갤러리현대]
200여 개 문자와 단 하나의 물방울을 대치시킨 1991년 작,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7×333.3㎝. [사진 갤러리현대]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 전시장.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작품 30여 점이 그득 걸렸지만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올해 그의 신작은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최근 그의 가족은 작업실이 자리한 서울 평창동 자택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조성하는데 합의했다. 미술계 인사들은 이번 전시를 두고 “혹 작가의 생전 마지막 전시가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FX시티

‘물방울 화가’ 김창열(91)화백 얘기다. 그의 개인전 ‘더 패스(The Path)’가 23일 개막했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창열의 개인전을 처음 개최한 이래 지금까지 13차례 전시를 열었다. 갤러리현대는 “김창열의 작품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열네번 째 전시를 마련했다”고 했다.

1991년 작, 캔버스와 한지, 먹과 아크릴, 130.3x162.2㎝. [사진 갤러리현대]
1991년 작, 캔버스와 한지, 먹과 아크릴, 130.3×162.2㎝. [사진 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에 방점을 찍었다. 이를테면 1층 전시장에서 소개한 1975년 작 ‘르 피가로’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세 명의 무장 강도가 은행을 털었다는 기사와 처칠의 전시회 풍자만화가 실린 프랑스 신문 1면 위에 수채 물감으로 투명한 물방울을 그려 넣었다.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이미지와 물방울이 만난 1987년 작 ‘회귀(Recurrence)’ 연작도 눈길을 끈다. 캔버스에 스며든 듯한 획의 이미지와 물방울들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림에 한자를 끌어들인 김창열 화백. 화폭에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명을 드러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림에 한자를 끌어들인 김창열 화백. 화폭에 우주와 인간, 자연과 문명을 드러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김 화백은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했다.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검정고시로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7년 한국의 앵포르멜(작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추상미술) 미술운동을 이끌던 그는 미국에서 4년간 판화 공부를 하고 1969년 파리에 정착했다.파워볼게임

물방울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1972년 파리에서 작업할 때다. “밤새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내고 캔버스를 재활용하려 물을 뿌려놨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다.” 그의 회고다. 이후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회화를 처음 선보였고, 2009년 한국으로 온 이후 지난해까지 물방울 그림에 반평생을 바쳤다.

1987, 캔버스에 유채, 195x330㎝. 위부터 3점 모두 ‘회귀’ 연작. [사진 갤러리현대]
1987, 캔버스에 유채, 195×330㎝. 위부터 3점 모두 ‘회귀’ 연작. [사진 갤러리현대]

1980년대 후반의 ‘회귀’연작부터 캔버스에 천자문을 쓰거나 그리고 문자 주변에 물방울을 정교하게 배치해 그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평론가들은 물방울과 천자문의 만남이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한 기폭제라고 보았다. 천자문 자체가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담고 있어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글자라는 기억의 장치가 물방울이라는 곧 사라져버릴 형상과의 미묘한 만남”이라 했고, 작고한 이일 평론가는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동양적 원천에로의 회귀”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엔 초록 바탕에 천자문의 첫 두 구절인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이라 쓴 ‘회귀’ 연작도 눈에 띈다. 그는 천자문을 쓰면서 한지와 먹 등 동양화 재료를 적극적으로 썼다. 농담을 다르게 쓴 글자를 겹겹이 교차시키며 쌓은 문자로 화면을 뒤덮기도 했고,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처럼 물감을 뿌리고 그 위에 라텍스로 만든 한자를 붙였다 떼어내며 입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단정한 글씨가 한쪽에 빼곡하게 자리한 대형 화면에 단 한 방울의 물방울이 마주한 1991년 작 ‘회귀’는 독특한 균형감 면에서 압권이라 할 만하다.

‘르 피가로(Le Figaro)’, 1975, 신문에 수채, 53.5x42㎝. [사진 갤러리현대]
‘르 피가로(Le Figaro)’, 1975, 신문에 수채, 53.5×42㎝. [사진 갤러리현대]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은 “동아시아 철학과 예술에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무상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찍이 바람, 구름, 물(이슬) 등에 주목했다”며 “김창열은 무상성을 상징하는 유수(流水)를 물방울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나눔로또파워볼

일본 미술평론가 주니치 쇼다는 “김창열의 회화를 단순한 리얼리즘 회화로 파악해선 안 된다”며 “스쳐가는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방울의 온갖 모습이 여기 담겨 있다. 요컨대 그것은 시간의 회화”라고 했다. 이어 “물방울 회화에서 화가의 의도는 다름 아닌 화면의 구성에 담겨 있다”면서 “얄궂을 정도로 정묘한 구성, 시적인 공간의 아름다움과 질서가 화면을 지배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전통적인 공간 감각이 살아 있다”고 했다.

1988년 도쿄 전시 당시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 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동이다. 나는 나의 자아를 무화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빛을 머금은 물방울,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평생 홀려 지낸 작가…, 김창열이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11중앙일보 주요 뉴스해당 언론사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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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들의 침16분전평생 물방울 울궈먹으며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계신 김창렬 작가님. 그분의 작품속엔 고3생 수준의 테크닉말고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 그냥 없다고 결론지을 수밖에요. 하다못해 조용남의 대작에서도 볼 수 있는 미미한 조형성과 내재된 도전정신, 창의욕, 연구욕, 재해석 , 작품에 대한 헌신, 자가분열 하나 엿보임이 없습니다. 짜장면 그릇만 바꾸고 신메뉴 개발 했다는 주방장 정도의 장인의식 외엔 전무. 그림은 뻔해도 언론사 뒷배와 갤러리 마케팅으로 그냥저냥 잘 팔리니 나머지 삶도 그렇게 편편히 사시길답글 작성댓글 찬성하기14댓글 비추천하기11
  • hjy17분전아름답다답글 작성댓글 찬성하기3댓글 비추천하기3
  • 크리스토퍼20분전나중에는 소리도 그리고 냄새도 그리고. 데이터도 그리는 화가 나오건데. 보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자.답글 작성댓글 찬성하기6댓글 비추천하기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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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인 2조9000억·외국인 1조2700억 달해
제주 관광객, 짧게 머물고 맛집 찾는 관광


“올해는 코로나로 축소…‘질적 성장’은 이어져”

지난 8월 14일 제주 해수욕장를 찾은 관광객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 8월 14일 제주 해수욕장를 찾은 관광객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해 제주를 방문한 관광객들의 카드 사용액이 역대 최고 규모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갈등 후 유커(游客·중국 단체관광객)가 줄어든 제주 관광시장을 내국인들과 중국인 개별 관광객 등이 채웠기 때문이다.

제주관광공사는 25일 “지난해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사용한 카드 금액이 역대 최대인 4조2190억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신한카드의 ‘2012~2019 제주 방문 관광객 카드 소비 분석’ 결과에 따른 카드 사용 규모다. 제주관광공사는 사드 체계 도입 후 유커가 줄어든 틈을 내국인 관광객이 채움으로써 전체 관광시장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제주관광공사가 주목하는 부문은 내국인 관광객의 소비성향 변화다. 지난해 내국인 카드소비 금액은 전체의 69.7%인 2조9440억원에 달했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는 “지난해 제주를 찾은 내국인 관광객 중 약 70%는 2회 이상 제주를 방문한 재방문객이었다”며 “최근 제주를 찾는 관광객의 여행패턴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으로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사드와 관련한 중국 측의 한국 관광 제한 정책이 다소 느슨해진 것도 카드소비를 늘리는 요인이 됐다. 지난해 제주를 찾은 외국인들의 카드소비 금액은 전체의 30.2%(1조2750억원)를 차지했다. 이는 전년보다 37.4% 늘어난 규모로 기존의 중국인 단체 관광객 위주에서 개별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가운데 중국 보따리상인 다이궁 (代工)의 활동이 재개된 게 맞물린 결과다.

지난해 제주 유채꽃 걷기대회 참가자들이 서귀포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해 제주 유채꽃 걷기대회 참가자들이 서귀포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최충일 기자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돈을 쓰는 곳도 확대되는 추세다. 제주는 2012년 카드소비 금액이 500억원 이상인 곳이 4개 동(洞) 지역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13개 지역으로 늘어났다. 기존 시내 중심의 관광패턴이 제주 곳곳까지 직접 찾아가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권역별로는 제주시 서부지역(20%), 제주시 동부지역(19%), 서귀포시 서부지역(19%) 순으로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읍면별로는 구좌읍(27%), 애월읍(22%), 대정읍(21%) 등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의 카드소비 규모는 제주시 동 지역에 집중됐으나 제주시 동부지역(37%)과 서귀포시 서부지역(24%)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업종별로는 소매업의 카드매출액이 지난해 1조9870억원으로 전년(1조5070억원)보다 크게 늘어났다. 음식점업은 7600억원에서 지난해 8210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숙박업은 2880억원에서 2850억원으로, 운수업은 8970억원에서 9180억원으로 각각 매출이 늘어났다.

지난해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제주시 연동의 모 면세점 앞을 지나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해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제주시 연동의 모 면세점 앞을 지나고 있다. 최충일 기자

이같은 변화는 맛집을 비롯한 식도락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음식점이나 소매점에서 소비하는 금액이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게 제주관광공사 측의 설명이다. 이런 내용이 담긴 ‘제주관광 이슈포커스 12호’는 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ijto.or.kr) 관광자료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선영 제주관광공사 연구조사센터장은 “지난해는 내국인 관광객이 특정 지역·업종·세대에 집중되지 않고 제주 관광산업 전체에 걸쳐 균형 있게 성장했다”며 “올해는 코로나19로 규모 면에서는 줄어들지만 언택트(비대면)·개별관광이 주를 이루면서 1인당 지출 비용과 여행기간 등이 늘어나 질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고 말했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이코노미조선]
<Interview>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평생직장이 없어졌다. 경제 침체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수십 년간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오던 제조업 대기업도, 고공 성장하던 항공·여행 업계에서도 평생을 회사에 바쳤던 직장인들을 내보내게 했다. 전문직도 기술의 발전이라는 더 큰 파도에 부딪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실감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고용 시장에서 많은 이들이 커리어 전환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은 코로나19 속 고용 시장에서 가장 입지가 좁아졌다고 평가받는 화이트칼라 ‘문과’ 사무직을 중심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이들이 어떻게 커리어를 계발해나가야 할지를 안내한다. [편집자 주]

원격·자동화 가속화돼
중간 일자리 도태될 것
직업훈련 실효성 재고 시급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앞당긴 원격·자동화 사회에서 ‘내 일자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미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저숙련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무·관리·제조직 등 중숙련 노동자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겁니다.”

10월 8일 경기 용인시 죽전동 단국대 연구실에서 ‘이코노미조선’과 만난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이미 기술 전문직은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인데, 중간 관리직은 구조조정 대상이 될까 전전긍긍 눈칫밥을 먹고, 서비스업 종사자는 실직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상황 아니냐”며 “코로나19 이후에는 더더욱 ‘각자도생’의 고용 시장이 펼쳐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감염병 위협으로 영업이 위축된 대면 서비스업이나 외식업, 항공업, 관광업 등에서 나타난 저숙련 노동자의 대량 실직을 ‘경기 변동에 대한 일시적 실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경제 구조가 재편된 결과, 이들 일자리 중 상당 부분은 ‘영원히 사라진 일자리’가 될 거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기술이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 것’으로 전락한 중숙련 노동자 다수도 소득이 많이 감소하거나 커리어 위기에 몰릴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19 여파는 일자리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꿨나.
“일단 원격 근무의 효용성을 근로자와 사업주 모두에게 경험적으로 증명했다는 점이다. 근로자는 출퇴근 러시아워에서 해방돼 가용 시간이 늘어났다. 매일 1시간씩이라고 하면 연간 260시간이 더 생긴 셈이다.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해도 되고 여가를 즐겨도 된다. 자율적인 업무 환경이 마련되면서 만족도도 높아졌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원격 근무가 비생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근태 관리 시스템의 발전 덕분에 업무 성과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고, 원격 회의도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 그러면 이제 주판알을 튕겨보는 거다. ‘원격 근무를 계속 유지하면 비싼 임대료에 전기세, 관리비까지 내면서 도심에 큰 규모의 사무 공간을 유지할 필요가 없겠구나.’ 여기까지만 보면 ‘윈윈(win-win)’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빌딩 청소부나 보안 요원 등이 일자리를 잃는다. 오피스 상권 주변의 자영업자도 장사를 접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중간 관리직이 존재할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태 관리는 소프트웨어가 알아서 하고, 업무 자체도 개체화되고 개별적으로 변하는데 차장이 왜 필요하고 부장이 왜 필요하겠나. 인사·총무나 경영지원 같은 부서를 둘 필요가 없어진다. 원격 근무에서는 팀원과 팀장, 즉 실무자와 책임자만 있으면 된다. 소비의 중심축이 비대면으로 옮겨지는 것도 관리직이 무용해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유통 업계는 온라인 쇼핑몰을 확대하고 마트를 폐업하는 추세인데, 그러면 해당 마트의 매장 운영, 재고 관리, 영업 판촉 등의 관리 부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는 얘기다. 사업주와 근로자 사이,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중간 과정’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쓸모를 다한’ 중간 관리직은 어떻게 되나.
“당장 해고하진 않고 기회를 줄 거다. 오프라인 시장이 줄어든 만큼 온라인 시장이 커졌기 때문에 일거리 자체는 줄지 않았다. 마트 영업 판촉을 했던 사람이라면 온라인 쇼핑몰 이용자 데이터 관리를 맡기는 식으로, 조직 개편을 통해 기존 중간 관리직에게 새로운 직무를 부여할 거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연차만 높은 저숙련 노동자로 전락하는 셈이다. 새로 배워서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 도태 수순이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떤 역량이 필요하나.
“직무와 산업에 따라 제각각 다르겠지만, 대체로 소프트웨어나 인공지능(AI), 로봇 등의 정보통신기술(ICT) 툴을 다루는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정보화 시대에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문해력)가 핵심 역량’이라는 말이 진부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다면 디지털 전환이 점진적으로 진행됐을 테지만, 지금은 일순간에 경제 구조가 뒤바뀐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런 기술을 습득해야 할지도 막막한데.
“‘새로운 직업 능력을 배울 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직업훈련 시스템이 그만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앞서 말했듯 원격·자동화로 인해 기존의 중숙련 노동자가 저숙련 인력으로 절하되고, 저숙련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고 빈곤층이 되는 현실이다. 직업훈련은 원래 이러한 저숙련 노동자가 고숙련, 혹은 새로운 중숙련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엉터리일 수가 있나 싶다. 정보기술(IT) 직업훈련이라며 가르치는 것들이 대부분 MS 오피스이고, 포토샵이다. 교육 종목이 시대 변화에 뒤떨어질 뿐더러 훈련생의 수준도 기업이 요구하는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직업훈련을 마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저임금 비정규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직업훈련이 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직업훈련의 근본적인 문제는 철저히 공공기관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적 채우기’를 위해 어떻게든 훈련생을 많이 받고, 어떤 일자리든 상관없이 취업만 시키면 장땡이다. 훈련생이 높은 수준의 기술을 숙달해서 얼마나 좋은 일자리로 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게 해도 강사나 훈련기관에 돌아가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이나 스웨덴 등에서는 직업훈련의 주체가 민간 기업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엉성한 훈련생을 양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사에서 채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갖춘 인적 자원 창출에 초점을 맞춘다. 민간 기업에 의한 직업훈련을 아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좋은 성과가 나온다.”

근로자가 새로운 기술을 배워 새로운 일자리로 이동하도록 촉진하려면, 어떤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가.
“기술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월 300만원의 일자리를 얻게 해 준 기술이, 내년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직업훈련, 그리고 재직자 재교육은 이제 국민의 사회적 권리다. 국비 지원금만 몇 푼 뿌리고 끝나는 제도가 아니라, 어떤 기술을 익혀야 산업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안내해주는 컨설팅부터 시작해 고급 기술을 획득하고 일자리로 연계까지 되는 ‘토털 서비스’로 거듭나야 한다. 또 파견 업체에 대한 규제도 풀어야 한다. 지금 정부는 파견 업체를 ‘일용직 노동자 임금을 착취하는 인력 알선소’로 치부하고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파견 업체가 기업의 요구에 따라 신기술을 교육하고 일자리까지 매칭하는 고용 안전망 역할을 한다. 그러지 못하면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고용 시장에서 우리의 생존법은 ‘각자도생’밖에 없다.”

-더 많은 기사는 이코노미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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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민주당 의원 자료
공무원인재개발원 교육 연수
박근혜·MB정부 내용 ‘복붙’
“창조경제는 핵심 국정철학”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 창조경제를 문재인정부 정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나라배움터 강의 교재 중 일부. [사진 제공=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 창조경제를 문재인정부 정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나라배움터 강의 교재 중 일부. [사진 제공=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사혁신처 산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이 문재인정부에서 임용된 공무원 대상 연수에서 이명박·박근혜정부 핵심 국정철학을 계속 가르쳐온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예상된다.

25일 매일경제신문과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인재개발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공무원 교육 사이트 ‘나라배움터’에서 이 같은 황당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까지도 민간경력채용 5급 사무관 연수 등에서 전임 정부의 국정철학과 과제를 가르친 것이다.

예를 들어 ‘헌법정신에 기반을 둔 공직윤리와 가치’ 강의 중 ‘공직자의 핵심 공직가치와 역할’에선 “現 정부”라는 표기와 함께 “창조경제와 국민행복, 민주성이라는 가치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공무원 교육을 하고 있음”이 나온다. 박근혜정부 핵심 국정과제·비전인 창조경제와 국민행복시대를 문재인정부 핵심 가치로 소개한 것이다. 또 ‘현 정부 전략가치’로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이라고 소개한다. 앞선 4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2월 취임사에서 밝혔던 정부 정책 기조다.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 창조경제를 문재인정부 정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나라배움터 강의 교재 중 일부. [사진 제공=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 창조경제를 문재인정부 정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나라배움터 강의 교재 중 일부. [사진 제공=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명박 전 대통령 정책 자문 기관인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시절 만들어진 자료도 여전히 ‘공직가치 실천의 중요성’ 항목 강의 자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08년 9월 25일 이 전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경쟁력강화회의에서 법무부는 “법질서 확립의 대표적인 장애 요인으로 불법집회와 시위(이른바 떼법)와 노사분규를 거론했고, 노사분규로 인한 생산과 수출 차질액이 5조원에 이른다”는 취지로 발표했다. 당시 헌법에서 보장한 집회 자유와 노동권을 부정하는 것이란 비판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을 민주주의·인권을 강조하는 현 정부에서 공무원에게 교육한 것이다.

또 강의에 인용된 수치 등은 2007~2013년에 발표된 자료였다. 박근혜정부 초기에 작성한 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에 새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재개발원의 직무유기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육 내용 중 ‘S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246조원이라고 추산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삼성경제연구소가 2013년 10월 발표한 자료다. 김 의원은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모두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채종원 기자]

을미사변 목격자 러시아인 사바틴
고종 요청으로 궁궐에서 당직 근무
“궁궐에서 일본인들 역할 감시”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10월 8일 화요일 오전 5시. 서울의 궁궐은 조선 군인들과 민간복 차림의 일본인 낭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됐다.…일본 낭인들은 왕비의 침소를 공격해 왕비와 세명의 궁녀, 내부대신을 살해했다. 이들은 시신을 궁궐밖에 끌고 나와서 불에 태웠다.’

1895년 10월 12일자 ‘뉴욕 헤럴드’가 전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해당 기사는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일본은 기사 보도 이전까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심지어 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중세적’ 갈등 과정에서 시해됐다고 변명했다.

기사로 전 세계적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결국 일본 군인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됐음을 시인하고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을미사변의 배후가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목격하고 생생히 알린 러시아인 사바틴 등의 증언 덕분이었다.

사바틴의 초상(사진=따찌아나 심비르체바)
사바틴의 초상(사진=따찌아나 심비르체바)

문화재청은 지난 19일부터 덕수궁 중명전에서 특별전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를 선보였다. 전시를 통해 을미사변 목격자인 사바틴의 건축가로서 생애와 활동을 조명했다. 전시를 보면 문득 건축가였던 사바틴이 왜 을미사변 당일 궁궐에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사바틴이 기록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당시 고종의 요청으로 경복궁에서 미국인 윌리엄 다이(William Dye) 장군과 당직을 서고 있었다. 군인도 아닌 외국인이 경복궁에서 당직을 서게 된 이유에 대해 이정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삼국간섭’ 등 시대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1895년 4월 23일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 반도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견제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외교적 개입으로 결국 일본은 철수하게 된다.

이 같은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과 손을 잡는다. 일본에게 황후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조짐을 느낀 고종은 미국인 닌스테드(F. J. H. Nienstead) 대령까지 3명에게 경복궁에서 당직을 서도록 했다.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조선의 입장을 해외에 전달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바틴은 “우리의 임무는 객관적 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궁궐에서 어떻게 명령을 내리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며 “순서에 따라 매 6일 중 4일동안 궁궐 내에서 체류했고, 궁궐에는 항상 두 명의 유럽인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사바틴의 증언서(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사바틴의 증언서(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이들은 고종의 신뢰를 받았던 것으로 관측된다. 이 학예연구사는 “당시 조선에는 많은 외국인이 있었지만 고종이 자신의 호위를 아무에게나 맡기진 않았을 것”이라며 “사바틴은 특히 1888년 관문각을 지으면서 쌓은 고종과의 신뢰가 이어졌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바틴은 이후 일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과 생활고에 시달려 한동안 조선을 떠났다. 일본의 암살위협과 더불어 그는 조선에서 임시직도 잃었다. 러시아 공사관은 그가 더 이상 조선에서 어떤 직무도 하기 힘들다는 통보까지 했다. 결국 4년여간 조선을 떠난 사바틴은 1899년 조선으로 돌아와 1904년 까지 여러 건축 및 토목에 관여하고 떠났다.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김은비 (demeter@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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